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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상의 보석이야기]세계 8대 불가사의에 꼽히는 호박의 방

한국군에 비친 카투사는 편한 곳에서 군기 없이 설렁 설렁 근무하는 한량 같은 존재로 생각되지만 미군의 기준에선 카투사는 너무도 열악한 조건에서 근무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똑같은 근무조건임에도 월급부터 확연히 차이가 있어 일반 미군 사병과 카투사의 월급은 50배에서 100배에 이를만큼 차이가 컸고 휴가나 그 밖의 혜택에서도 월등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내에 있는 대부분의 유료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고 카투사 처우 개선의 일환으로 미군에겐 없는 한 달에 한 번 3일의 포상 휴가를 가곤 했다. 가끔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실정을 모르는 신병들은 우리가 받는 이런 혜택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지만 속사정을 알고 나면 그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한 나라 두 개의 문화권에서 생활하다 보니 한국군의 잣대론 카투사는 엉터리 군인이지만 미군의 눈에는 똑같이 일하고도 항상 배고픈 용병인 것이다. 평일에는 일과의 종료를 알리는 오후 4시 반 점호가 끝나면 우리는 통금시간인 밤 12시 전까지 영내 외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미군들은 일이 끝나면 영외에 있는 바나 클럽에 가서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지만 가진 것 없는 카투사는 삼삼오오 모여서 운동을 하거나 영화관을 몰려다녔다. 그러다 월급 3-4천 원이라도 받는 날이면 우리는 의정부로 나가 회식도 하고 당구도 치면서 몇 시간 만에 한 달치 월급을 몽당 탕진하고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보충하기 위해 지급되는 양말, 내복, 치약, 비누 등의 보급품을 아껴 쓰며 양키시장에 내 다 팔았고 생활에 도움이 되면 부업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작대기 두 개, 일병이 되고 나서야 내가 꿈꿔 왔던 중대 행정병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행정병이 되기 위해 창피를 무릅쓰고 여고생들에 둘러 싸여 타자기를 두들기며 꿈을 키워 왔는데 우여곡절 끝에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과를 마치고 중대 본부를 나서려 하는데 평소에 나에게 다정이 인사를 건넸던 흑인 상병이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쭈뼛쭈뼛 내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런저런 뜬구름 잡는 얘기로 말을 시작하더니 이윽고 나에게 한가지 부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애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태어나서 영어만 쓰고 살아온 미국인이 평생 한국말만 하고 산 나에게 영어로 연애편지를 부탁하니 나는 한동안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았다. 할 말을 잃어 멍 때리는 내 모습을 보고 그는 내가 편지에 대한 대가를 기다리는 줄 알고 편지를 써 주면 맥주 한 박스와 말보로 담배 한 보루를 선물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나는 선물에 눈이 어두워 앞뒤 생각 않고 오케이를 해 버렸다. 그는 한국에 오기전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 연락이 뜸해지자 관계가 소원해졌고 이윽고 결별을 통보하는 편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내가 중대 행정병이라 자기보다 당연히 영어를 잘 쓸 거라 생각하고 부탁을 했지만 나는 타자를 잘 치는 거지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군대는 문서 양식이 정해져 있어 이미 만들어진 틀안에 정보만 입력해 뽑아내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별로 필요치 않았다. 오케이를 하고 방에 들어오니 마음은 더없이 착잡해 왔다. 한국말로도 한번 써 본 적이 없는 연애편지를, 그것도 영어로 뭘 어떻게 써 줘야 하는 건지 머리에선 이미 쥐가 나기 시작했다. 밤새 뒤척이다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다음날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캠프 안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고, 사서에게 연애편지 쓰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리자 그는 주저 없이 몇 권의 책을 책장에서 뽑아다 주었고 나는 그것들을 본 순간 오줌 쌀 것 같은 전율을 온몸으로 느꼈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편지쓰는법’, ’로맨틱한 편지쓰기’, '연인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백가지 문장’ 등 내가 찾던 바로 그것들이 내 앞에 있었다. 학교 다니며 연마한 짜깁기 실력으로 나는 한편의 위대한 서사시를 완성했고 그것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내가 써 준 편지가 애인에게 통했던지 그 후로도 나는 그의 편지를 대필해 주었고 입소문을 타고 더 많은 의뢰인을 얻을 수 있었다. 맥주 한 박스와 담배 한 보루는 공식 가격이 되었고 나는 제대할 때까지 줄곧 이 일을 부업 삼아 맥주와 담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보석상식 51: THE AMBER ROOM(호박의 방) 영어로는 AMBER, 한국어로는 호박으로 불리는 엠버는 나무의 송진이 오랜 세월을 거쳐 화석화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진주와 더불어 광물로 구성되어 있지 않는 유일한 보석입니다. 약 5천만 년전의 지질시대에서 형성 된 호박은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사용해 온 가장 오래된 보석 중의 하나입니다. 호박의 대표적인 산지는 발틱해 주변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노리게, 비녀, 마고자 단추 등 귀족과 부자들의 장식구를 만드는데 사용됐습니다. 호박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것으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 위치한 호박의 방(THE AMBER ROOM)이며 세계 8대 불가사의에 꼽히는 것이었습니다. 호박의 방은 원래 러시아가 아닌 독일에 있었지만 호박의 방에 눈독을 들인 러시아 황제 표도르 1세에 의해 러시아 근위대와 호박의 방을 맞 교환하는 호박의 방 외교를 펼친 끝에 러시아의 겨울궁전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 세계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 나치에 의해 약탈 당했으며 그 후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부단한 노력에도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자 1979년부터 호박의 방을 복원하기 시작했지만 자금난으로 일시 중단해야만 하는 고비를 겪게 됩니다. 그 후로 독일 기업의 도움을 받아 50명의 전문가들에 의해 마침내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창건 300주년 일에 마쳐 일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이 호박방은 50만 개의 크고 작은 호박을 잘라 퍼즐 조각을 맞추듯 만들어졌으며 최근 들어 중국인의 호박 사랑으로 호박 가격은 급상승했으며, 더불어 이 호박방의 가치 또한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 되었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6-08

[보석상의 보석이야기]브래드 피트가 제니퍼 애니스톤에게 선물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진주는?

거기만 아니면 어디를 가던 상관있으랴 하던 바로 그곳, 미 제2보병 사단으로 배치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눈앞이 깜깜했다. 2사단은 전투사단이라 훈련도 많고, 주말이면 자유롭게 생활하는 후방부대들과는 달리 외출도 제한되어 있어 우리들 사이에서는 2사단에 갈 바에는 한국군에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라는 얘기를 하던 터라, 2사단 배치 소식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부산, 대구, 평택, 서울도 있건만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곳들 중에 최전방에 있는 2사단이란 말인가. 나는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 군대에서 좋은 보직을 받기 위해 종로에 있는 타자 학원을 다녔다. 타자를 잘 치면 행정병으로 편한 군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자들에 들러 싸여 하루 종일 타자기를 두들겨야 했고 덕분에 나는 영문 1급, 한글 2급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병사단인 2 사단은 대부분이 전투병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가 원하는 행정병 보직은 사실상 물 건너 갔고 소총 들고 산과 들로 박박 기어 다닐 생각을 하니 자대로 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12월의 날씨만큼이나 마음도 무거운데 차장밖에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하염없이 눈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가 2사단 본부가 위치한 동두천이 아닌 의정부에 있는 포 사령부로 나는 최종 배치가 되었다. 내가 배치된 포병중대는 미군 120명과 카투사 1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투사는 한국군이지만 미군에 소속되어 미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일과 생활을 미군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많은 월급, 휴가 그리고 각종 혜택을 받는 미군과는 달리 우리는 군 생활 동안 보름의 휴가와 한국군에서 주는 몇천 원의 월급이 전부였다. 그리고 인사권이 한국군에 있어 우리를 처벌하고 재배치하는 권한은 한국군에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우리는 각종 혜택을 다 재배치하는 있는 정규직이 아니라 일종의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비정규직인 것이다. 신병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일을 마친 카투사 고참들은 속속 카투사 선임방에 집결했고 나를 환영하는 환영식과 더불어 신고식이 진행되었다. 주는 술잔마다 마다 않고 받아 마시다 보니 어느덧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기가 올랐고 이어서 고참들의 질문과 기합이 쏟아졌다. 질문에 솔직히 답하면 오늘 신고식을 쉽게 끝내겠다는 최고 선임의 꼬임에 나는 취기를 빌려 솔직히 답했고 그 솔직함은 더 큰 화근이 되어 군 생활 내내 나를 괴롭히는 빌미가 되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고 온몸은 어젯밤 기합과 구타로 성한 곳 없이 아팠다. 나는 취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로 어젯밤 일을 되돌려 보았다. 중대 카투사들을 한 명 한 명씩 자세히 보고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라는 최고 선임의 명령에 나는 느낀 그대로 대답한 죄 밖에 없는데…. 변태처럼 생겨서 변태 같다고 했고, 느끼하게 생겨서 느끼하다 했고, 기생오라비 같아서 기생오라비라고 했고, 사기꾼 같아서 사기꾼 같다고 했는데…. 그 후로 그것은 그들의 별명이 되었고 그들의 별명이 불릴 때마다 나는 고참들에게 내 뒤통수를 내 주어야 했다. “야 변태” 하면 나는 변태한테 맞아야 했고, “야 기생 오라비” 하면 나는 기생오라비한테 맞아야 했다. (다음에 계속) 보석상식 50: 브래드 피트가 전 부인 제니퍼 애니스톤에게 선물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진주, 자연이 준 선물, 컹크 펄(CONCH PEARL)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고 다니는 대부분의 진주는 양식을 통해 대량 재배된 양식 진주입니다. 조개 속에 인위적으로 핵을 심어 5년에서 7년을 기다리면 우리가 하고 다니는 진주가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컹크 펄은 인위적인 양식이 불가능해 자연 상태에서 컹크라는 불리는 대형 소라가 스스로 핵을 생성해 만들어 낸 칼슘 덩어리인 것입니다. 컹크 펄이 지닌 색상 또한 다양해 하얀, 노란, 핑크, 빨간등 다채로운 색을 갖고 세상에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구름이 낀듯한 핑크색은 단연 으뜸으로 쳐 주며 값 또한 다이아몬드 그 이상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원형인 양식 진주와는 달리 타원형(OVAL SHAPE)으로 생성되며, 진주의 지름으로 사이즈를 구별하는 양식진주와 달리 컹크 펄은 보석의 캐럿 웨잇(CARAT WEIGHT)으로 크기와 값이 정해집니다. 즉 양식 진주는 몇 미리 짜리가 얼마라고 하지만, 컹크 펄은 다이아몬드처럼 캐럿에 얼마로 통용됩니다. 수많은 진주 양식업자들이 양식을 통해 대량생산을 꿈꿔 왔지만 아직 한 번도 양식에 성공한 적이 없는 컹크 펄은 그래서 그 희귀성과 아름다움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진주인 것입니다. 일부 한국 분들은 컹크 펄을 콘치 펄이라고도 발음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발음입니다. 컹크 펄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6-01

[보석상의 보석이야기]사랑 때문에 왕위를 버린 영국 왕 에드워드 8세

“엄마, 나 군대가….” 엄마는 뭔가에 얻어맞으신 듯 한동안 멍하니 나를 쳐다보시더니 말을 이으셨다. “너 입영 통지서도 안 나왔는데….” “나 지원했어 카투사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대 없이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그냥 지원해봤는데 카투사 시험에 덜컥 붙어 버렸다. 나는 합격 통지서를 받은지 3개월 만에 논산 훈련소에 입소해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과 2주간의 유격훈련을 마치고, 마지막 4주간의 미군 교육을 받기 위해 평택에 있는 미군부대, 캠프 험프리로 이동해야 했다. 속칭 ‘양키’에게 빌붙어서 편하게 군대 생활할 너희 놈들은 고생 좀 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6주의 군사훈련은 그 어떤 연대의 훈련보다 더 힘들고 고달팠다. 83년 9월 말에 입대한 논산 훈련소는 훈련이 끝나고 나니,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싸늘한 11월이 되었고 이마에는 이병 작대기 하나가 붙어 있었다. 논산역 플랫폼에는 갓 배출된 신병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머리 부분인 기관차 앞쪽 열차 칸은 최전방에 배치될 신병들을 위한 것이었고 뒤로 갈수록 후방에 배치되는 병력이 탔다. 그리고 각 열차마다 헌병이 앞뒤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전방으로 가는 병력이 탄 열차에는 혹시 모를 탈영에 대비해 헌병들의 경계가 유독 삼엄했다. 초주검이 되어 있는 전방 배치 병력에 비해 맨 뒤쪽에 배치된 카투사 병력이 탄 열차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표어가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다가올 군대 생활에 대한 걱정보다는 미군부대 생활에 대한 기대로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실은 열차는 평택역에 도착했고 우리는 전방으로 이동하는 병력들과 이별해야 했다. 차창 맞은편에 우리를 응시하는 눈동자들은 초조와 부러움으로 뒤섞여 있었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잘 가라 전우여… 조국 영토 방위를 위해 너희 한 몸 다 바쳐라.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돈단다.” 라고 마음으로 소리쳤다. 우리를 인계받기 위해 온 미군과 카투사 조교는 나름 군기를 잡기 위해 목청도 높이고 얼차려도 주었지만 그전에 우리가 만났던 훈련소의 유격 조교에 비하면 그들은 사관과 신사에 나오는 젠틀맨이었다. 내무반에서 짐 정리를 마치고 우리는 식사를 위해 매스 홀(미군 식당)로 이동했다. 귀동냥해서 듣던 미군 식당을 눈으로 미군 식당을 그 규모는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넓은 홀안에 잘 차려진 테이블 위에는 육해공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다양한 종류의 주스와 소다, 각종 육류와 해산물 그리고 태어나 생전 처음 보는 열대 과일 등 최상급 호텔에나 가야 맛볼 수 있는 진수성찬이었다. 지금은 한국도 모든 게 흔하고 풍요롭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하던 80년대 초만 해도 이런 음식들은 보통 사람들이 먹기 힘든 것이었다. 논산 훈련소에선 항상 충분치 못한 배식 탓에 옆 전우에게 돼지비계 한점이라도 더 가면 하루 종일 고기 한점 생각에 밤까지 잠 못 들었다. 그리곤 내일 배식 때는 내게 더 많은 밥과 고기 한점이라도 더 들어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시절이었다. 항상 배고팠던 논산 훈련소 생활이었기에 미군 식당은 나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나는 제대하는 그날까지 이런 산해진미에 빠져 살 생각을 하니 입가엔 미소가 절로 생겨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양식과 작별 아닌 작별을 해야 했다. 평택 교육대에 입대한지 2주째, 아침을 먹자마자 나는 쏜살같이 식당을 박차고 나와 위 속에 집어넣었던 모든 음식을 토해 내고 말았다. 신토불이라고 했던가…, 역시 우리 몸에는 우리 음식이 최고인가 보다. 평생을 된장과 김치에 익숙한 내 몸이 느끼한 버터에 한계를 느끼고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라면이 그렇게 좋고 귀한 음식이라는 것을. 그 후로 나는 남은 미군 생활을 라면과 봉지 김치로 연명했고 가끔 가사 장학금이 집에서 도착하면 카투사 스낵바에서 김치찌게나 된장찌게로 내 불쌍한 위를 달래야만 했다. (다음에 계속) 보석상식 49: 사랑 때문에 왕위를 버린 영국 왕 에드워드 8세 갑작스러운 아버지 조지 5세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에드워드 8세는 미국인 심슨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이미 두 번의 이혼 경력과 미국인인 그녀의 신분 때문에 왕실의 강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결국 왕위를 버리고 사랑을 택하게 되는 세기의 러브 스토리 주인공이 됩니다. 왕위에서 물러난 후 에드워드 8세는 윈저공으로 칭해집니다. 윈저 공이 된 에드워드는 미안한 마음에 심슨 부인에게 평생을 통해 수많은 보석을 선물하게 되고 그는 입버릇처럼 심슨 부인에게 선물한 모든 보석을 심슨 부인 사후 분해해 그녀 외엔 아무도 그 보석들을 가질 수 없게 해 달라고 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애틋함을 보석으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사후 1987년 심슨 부인이 소유한 214점의 보석들이 경매에 나오게 됩니다. 그중 THREE OSTRICH PLUME DIAMOND BROOCH는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기 전 왕자의 신분일 때 미래의 부인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것을 두고 경매에서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심슨 부인과 각별한 우정을 나눈 할리우드 여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맞붙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녀와의 우정과 추억이 담긴 이 물건을 찰스 황태자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예상가를 초월하는 고가를 쓰게 되며 낙찰받게 됩니다. 살아생전 둘도 없이 가깝고 친하게 지냈던 심슨 부인과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보석에 있어서 만큼은 서로에게 지기 싫어해 상대보다 더 좋은 보석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했다고 합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5-18

[보석상의 보석이야기]밤·낮으로 변하는 메두사의 두 얼굴을 한 보석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고된 훈련과 몽둥이세례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몸은 더 이상 가눌 수 없게 떡이 되어 버려 나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그 자리에 뻗어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머니는 나를 깨워 일으켜 세우시더니 2층에 있는 내방에 들어가 자라고 하셨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고 어머니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시고 얼마나 우셨는지 눈은 퉁퉁 부어 계셨다. 지난 밤 몸도 못 가누고 쓰러져 끙끙 신음소리를 내며 자는 내 모습을 보시고, 옷이라도 벗겨 편히 재우려고 바지를 벗기다가 궁둥이와 허벅지에 난 시퍼런 멍 자국들과 피 묻은 팬티를 보시고 그만 기절할 만큼 놀래 버리신 거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늦게 귀가하는 줄로만 아셨던 어머니는 이 일로 내가 매일 몽둥이찜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얻어 맞고 다니는 내 모습에 분노하셔서 그길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셨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담임 선생님은 보이스카우트 대장 선생님께 이사실을 알렸고 그날로 보이스카우트 단실엔 커다란 대못이 박혔다. 그리고 나로 인해 한동안 아무도 단실에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이 일로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창피하고 미안해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고,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어 내 스스로 얼굴에 주홍글씨를 쓰고 다녔다. 매일 고된 훈련과 몽둥이찜질에 몸과 마음은 지쳐갔지만 다음날이면 뭔가에 홀린 듯이 다시 찾던 단실, 허구한 날 우리를 두들겨 패던 하나님과 동창인 선배들, 그 선배들이 자기 용돈을 쪼개 사 주던 라면 한 그릇, 어느 날 졸업한 선배라도 찾아오면 먹을 수 있었던 곱빼기 짜장면,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리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이 모든 과정을 참고 견디어 왔건만 나 자신이 창피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학교에다 이 사실을 알린 어머니가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먼저 손 내밀어 위로해 준 동기와 선배들이 있어 나는 외롭지 않았고 그래서 내 얼굴에 써 놓은 주홍 글씨도 지울 수 있었다. 어느 날 학교를 졸업한 선배가 단실을 찾아와 우리에게 해 준 말이 생각난다. 지금 여러분이 이 훈련 과정을 무사히 마친다면 후에 해병대를 가도 쉽게 군대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해병대를 안 갔다 와서 알 수는 없지만 내가 겪은 6주간의 논산 훈련소 생활은 식은 죽 먹기가 맞았다. 그리고 나의 이런 학창시절 경험은 후에 내가 세상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고, 수많은 어려움과 죽을 고비를 겪은 남미 콜롬비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35년이 지났다. 우리는 매일 카톡방에서 대화를 나눈다. 칠십이 훌쩍 넘은 선배들부터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배들까지 시대는 달랐어도 같은 학교 같은 단실에서 하나의 정신으로 전 세계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다. 1922년 독립운동가 관산 조철호 선생님이 대한민국 최초로 서울 중앙 중 고등학교에 세우신 대한 소년단(한국 보이스카우트), 나는 이곳의 일원이라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보석상식 48: 밤 낮으로 변하는 메두사의 두 얼굴, 알렉산드라이트(ALEXANDRITE) 낮에는 에메랄드로 밤에는 루비로 변하는 알렉산드라이트는 그 희귀성에서 다이아몬드를 압도하며, 최상급의 알렉산드라이트는 값 또한 메길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보석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1830년 러시아의 우랄 산맥에서 처음 발견되어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이름을 따 알렉산드라이트로 명명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 보석의 존재가 두각을 나타나게 된 데는 밤 낮으로 바뀌는 색의 변화뿐만 아니라 러시아 황실 군대를 상징하는 녹색과 빨간색을 띄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러시아에서 거의 채굴이 되지 않으며 대부분이 스리랑카, 동아프리카, 브라질 등에서 생산됩니다. 하지만 최상급의 알렉산드라이트는 단연 러시아산을 꼽습니다. 실질적으로 밤 낮으로 바뀌는 색의 변화는 빛이 광물에 투과될 때의 조도에 영향을 받는 것이며 또한 빛이 쏘여지는 각도에 따라 밤 낮에 상관없이 색의 변화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라이트는 진주와 문스톤과 더불어 6월의 탄생석으로 결혼 55주년 때 선물하는 보석으로 유명합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5-11

[보석상의 보석 이야기]학대가 학습이 되면, 사랑으로 믿게 된다

외아들인 나는 어릴 적부터 외아들이라는 단어를 무척 싫어했다. 항상 여자들에 둘러 싸여 살던 나는 왠지 외아들이라고 하면 마마보이 또는 계집애 같은 이미지가 머릿속에 상상되곤 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 나의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친구들이 가끔 나를 보곤 “애, 참 이쁘게 생겼다.” 라고 하면 나는 속으로 이 아줌마 참 무식하시네, 사내아이 보고 이쁘다니 잘 생겼다라고 해야지라면서 그 아줌마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어떤 아줌마가 나를 보곤 잘 생겼다고 하면 나는 그 아줌마가 김지미보다 더 이뻐 보였다. 단어 하나에도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외아들의 이미지를 벗고 남자로 거듭나기 위해 클럽에 가입하기로 마음먹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도부, 검도부, 역도부도 생각해 봤지만 누군가와 몸으로 겨룬다는 것이 영 자신이 없어 나는 클럽 이름도 세련된 영어고 캠핑 같은 야외 생활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 스카우트를 찾아가게 되었다. 처음 본 2학년 선배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클럽에 대해 자상히도 설명해 주었기에 그런 선배가 무척 호감 가고 지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환상일 뿐이라는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클럽에 가입하고 나니 선배들의 자상함은 조폭 이상으로 잔인하게 변했고 지적인 건 '개가 다 물어갔다'라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모든 게 일 학년 단원을 모집하기 위한 사기였다는 것을 클럽에 가입하고 얼마 안 돼 알 수 있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을 배운다는 명목하에 우리는 방과 후 단실에 남아 다양한 훈련을 소화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기합과 몽둥이 세례에 할당되었다. 우리는 허구한 날 푸시업과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지고 있는 일명 ‘원산폭격’ 이란 기합을 받았는데 그 기합으로 가뜩이나 머리가 안 좋은 우리는 정말 돌 대가리로 변해 갔고 마침내 그 자세로 이삼십분은 거뜬히 잠을 청할 수 있는 득도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선배는 하나님과 동창이라는 구호 아래 선배로부터 몽둥이 세례는 일상이 되었다. 사이비 종교처럼 학대가 학습이 되다 보면 학대도 사랑으로 믿게 된다. 간혹 선배로부터 몽둥이찜질이 없는 날이면 우리는 화장실 가서 밑 안 닦고 나온 찜찜한 기분으로 집에 가야 했고 뭔가 죄짓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님과 동창인 선배의 노래 한 곡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학교 앞 구멍가게로 달려가 선배가 좋아하는 음료를 사 와야 하는 벌칙을 받곤 했는데, 나날이 빨라지는 우리의 동작만큼이나 선배의 노래 솜씨 또한 일취월장하여 우리는 한 번도 미션을 완성해 본 적이 없었다. 갈수록 더해지는 훈련의 강도에 이탈하는 친구들이 생기면 우리는 어김없이 그들을 체포해서 단실로 끌고 와야 했다. 마치 교도소에서 탈옥한 탈주범을 잡듯이. 그들의 거주지는 물론 분식점, 빵집, 당구장까지 샅샅이 이잡듯이 뒤졌다. 그 와중에 우연히 길가에서 여학생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어떻게 해 볼 요량으로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김우중 씨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정말 많다.’ 고된 훈련과정을 모두 마치고 우리는 선서식, 학교 축제인 석전 등을 무사히 치러 내며 2학년이 될 날만을 학수고대했다. 내년이면 우리도 선배들로부터 받은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새로 들어올 나의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몇 배로 베풀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갖고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그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에 계속) 보석상식 47: 피의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블러드 다이아몬드 혹은 피의 다이아몬드는 전쟁 중인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돼 국제 협정을 어겨가며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판매되는 다이아몬드를 지칭합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로 의심되는 대표적인 나라로는 앙골라,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콩고 민주 공화국, 짐바브웨 등이며, UN은 1998년 처음으로 전쟁자금으로 유용되는 다이아몬드에 대해 문제 제기를 시작했지만, 블러드 다이아몬드 생산과 통제를 위해 협의체가 구성된 것은 다이아몬드 생산업자들의 노력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2005년 남아프리카 킴벌리에선 다이아몬드 생산국들이 참가한 회의가 열렸으며 이때 다이아몬드를 구입한 소비자가 본인들이 구입한 다이아몬드가 폭력과 연관되지 않았음을 증명받아야 한다는데 동의하게 되었고, 그 후 회의에서 다이아몬드 수출과 수입에 있어 투명성을 높이는 제도가 발의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문제점에 대한 전 세계적인 인식을 높였고, 다이아몬드 유통에 있어 벌어지는 서 아프리카의 비극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5-04

[보석상의 보석이야기]남자가 가지면 저주를 받는다는 다이아몬드

나는 외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할아버지부터 이모, 고모, 심지어 내 아랫것들, 누나들까지 내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었다. 과자를 사면 반은 내 것이고, 반은 나 때문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나머지 4명의 무수리들 것이었다. 식탁에 생선이 오르면 몸통은 내 것이요 머리와 꼬리만 그녀들의 것이었다. 갓 만들어 낸 따듯한 밥은 언제나 내 몫이어서, 나는 어렸을 때 찬밥이 무슨 뜻인 줄 몰랐다. 나의 이런 유년기 환경은 세상은 살 만한 곳이란 걸 일찍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내가 알고 있던 사랑은 집착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알고 있던 관심은 간섭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불우한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친구들과 뭐라도 하려 하면 누나들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나쁜 길로 빠진다고 못하게 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엄마에게 빠짐없이 고자질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과 여동생이 나를 버리고 이란으로 떠나 버린 일 년 동안 나는 서커스단의 동물처럼 누나들에게 철저히 사육되고 조련되었다. 전에 나는 누나들도 이름이 있는지 몰랐다. 자기네끼리는 뭐라 부르는데 나는 그들을 그냥 ‘야’라고 불렀다. 내가 누나들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골방에 끌려가서 개 패듯이 뒈지게 얻어맞은 후였다. 그때야 누나들도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름 뒤에는 누나 자를 꼭 붙여야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중학생이면 밥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누나들의 격려에 밥하는 법도 배웠고 누나들이 늦은 밤 시장기를 느낄 때면 라면이나 떡볶이도 만들 줄 아는 센스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쫄따구는 지구를 생각해 밥풀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핥아 먹어야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당시 대학생이던 큰누나는 엄마 대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캠퍼스 커플로 만난 지금의 큰 매형에게 푹 빠져 내 용돈 주는 것도 잊어버리고, 주는 액수도 점점 줄어갔다. 나는 모자라는 용돈을 보충하기 위해 내가 아직도 우리 집에서 왕인 줄 알고 있는 다른 친척 집을 전전하며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라는 맹인 가수 조용복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일 년의 시간이 지나고 엄마가 이란에서 돌아오시는 날 나는 그동안의 설움을 날려 보내고 너희 셋 무수리들을 가만두지 않겠노라 복수를 다짐하면서 김포공항으로 나의 구세주를 마중 나갔다. 환영장의 자동문이 열리고 나의 구세주는 머리에 후광을 발하며 나타났고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엄마의 품에 안겼다. 엄마는 나를 보시더니 “우리 아들 엄마 없는 일 년 동안 어른이 다 되었구나.” 하시며 흐뭇해하셨다. 그리고 나는 지난 일 년의 노예생활에서 겪은 모진 고초를 엄마에게 고발하려는 순간 나는 세 무수리 아니 세 누나들의 눈빛을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골방의 추억을 떠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학교 공부보다 더 열심히 외우고 또 외웠던 지난 일 년간의 만행들을 홀딱 까먹게 되었다. 무수리들을 징벌하려는 의지는 어느새 누나들과 더불어 “차카게 살자.”로 바뀌었고 내 두 손은 누나들의 손에 잡혀 차에 올랐다. 보석상식 46: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다이아몬드 코이누르(KOH I NOOR) 5000년 전의 기록에서부터 나오는 이 다이아몬드는 서기 1304년부터 역사서에 코이누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코-이-누르는 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이라 뜻으로 이것을 가지면 “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된다”는 전설과 함께 “남자가 가지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무려 105캐럿에 달하고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코이누르는 본래 인도의 카카티야 왕조의 것이었지만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마지막엔 인도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든 영국의 손에 떨어지게 됩니다. 당시 인도를 지배한 시크 왕조의 마지막 왕인 둘레프 싱은 영국을 따르겠다는 충성의 뜻으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코이누르를 바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인도의 왕 둘레프 싱의 나이는 13세에 불과해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인도 정부는 왕의 의지대로 영국에 바친 것이 아니라 영국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 주장하게 되고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반환을 요구합니다. 남자가 가지면 저주를 받는다는 속설 때문에 영국 왕실은 빅토리아 여왕에서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인 퀸 마더(QUEEN MOTHER)로 이어져 내려오다 2002년 퀸 마더의 사후 지금은 타워 오브 런던에 보관 전시됩니다. 영국은 약탈한 문화재는 돌려줘야 한다는 법이 있지만 2010년 캐머런 총리는 있을 수 없는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며 코이누르를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런 속사정에는 코이누르를 돌려주게 되면 영국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온 수많은 문화재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4-27

[보석상의 보석이야기]기생에게 신라금관을 씌우고 술판을 벌이다

옛말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다. 오십 중반이 되어보니 그 말이 절절히 마음에 와 닿는다. 내가 하는 말을 내 귀로 듣고 있노라면 내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아내는 내 걷는 모습이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 아이들은 내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로 착각한 적도 있다. 나는 어릴 적 주말이면 아버지를 따라 시내도 나가고, 산으로 등산을 가곤 했다. 나는 아버지 옆에 없어서는 안 될 자석 같은 존재였다.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이라 아버지는 유난히도 나를 이뻐하셨고 그래서 늘 나를 옆에 끼고 다니셨다. 어느 날인가 나는 아버지와 놀이동산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어려서 이유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아버지와 택시기사 사이 실랑이가 벌어졌고 마침내 기사의 입에서 담기 힘든 쌍욕이 터져 나왔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 상황이 당황스럽고 몹시 화도 났지만 아버지는 화를 꾹 참으시며 별다른 대꾸 없이 차에서 내리셨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아버지가 슈퍼맨처럼 택시기사를 혼내 줄 거라 기대했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나의 상상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도 창피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세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버지의 행동은 백번 옳았다. 자식 앞에서 기사와 똑같이 쌍욕으로 맞대응했다면 비록 아버지가 슈퍼맨처럼 기사를 물리쳤더라도 나에겐 더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장독대에 올라 칼싸움 놀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나는 뒤로 물러서다 방범용 쇠창살에 옆구리를 찔렸다. 옆구리에 뚫린 구슬 크기의 구멍을 확인하고 나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나는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후 집 안방에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들면서 서서히 공포가 밀려왔다. 낮에 얻은 상처의 고통이 아니라 퇴근해서 오실 아버지께 혼날 걸 생각하니 막연히 무서웠던 것이다. 아버지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나는 죽은 듯 자는 연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앞에서 눈을 말똥 말똥 뜨고 있으면 한대 얻어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오셔 내 상처를 살피시더니 말없이 닭똥 같은 눈물은 흘리시며 나를 한없이 어루만졌다. 나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영화를 보여 주겠다는 아버지의 꾀임에 빠져 단성사 근처의 비뇨기과에서 남자로 거듭나기 위한 성형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완강히 거부하는 나를 십분이면 끝나니 수술받고 영화 보러 가자는 아버지의 달콤한 속삭임에 또 한번 속아 강제로 수술대에 올랐다. 할리우드 영화 ‘7인의 신부’를 볼 생각에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수술을 받고 있는데 옆에서 수술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의사는 나를 수술하다 말고 젊은 간호원과 나, 둘만을 남긴 채 아버지의 응급처치를 위해 옆방으로 이동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의사는 성형부위를 꿰매다 말고 나가버렸고 나는 그녀와 어정쩡하게 둘이 남았다.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의 몸에 그것도 중요한 그곳에 칼을 들이대자 옆에서 지켜보다 기절해 버리신 거다. 나는 그날 영화를 못 봤다. 아버지는 늘 내 상상과는 다른 리액션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걸 나는 내 자식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팔십 중반이 되신 나의 아버지, 어릴 때 막연히 무섭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와 지금은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화하며 농담도 주고받는다. “니가 아직 철이 안 들어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 나는 아버지 오래 사시라고 철들고 싶어도 못 든다고 맞받아친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자란 내 딸들도 아빠인 나를 친구처럼 대한다. 하지만 가끔은 딸들의 구박이 지나쳐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다. 스물네 살에 미국에 와 올해 만 삼십 년이 된다. 아무리 고치려 해도 구제불능인 내 영어 발음은 항상 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지만 나는 그래도 항상 웃는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한다. “까불지마! 요놈들아, 그래도 이 안되는 영어로 미국에서 너희들 이만큼 키워 났거든!” 오늘따라 아버지가 유난히 생각난다. 보석상식 45: 기생에게 신라금관을 씌어 놓고 술판을 벌인 고이즈미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금관 국가입니다. 세계에 현존하는 고대 금관은 총 10점인데 그중에서 신라금관 6점과 가야 금관 1점이 우리나라 것입니다. 보존상태도 우리의 것이 가장 완벽하다고 합니다. 신라금관이 발견된 곳은 1921년 경주의 대릉원 바로 옆인데 주민이 집터를 파다가 금관을 비롯해 수많은 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일제 당국은 제대로 된 기록도 없이 고고학 발굴사에 천추의 한을 남기며 단 4일이라는 짦은 시간에 발굴을 마칩니다. 이곳은 금관이 발견된 곳이라 하여 금관총이라 이름 짓습니다. 1500년 전 선조의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신라금관은 이렇게 아픈 역사 속에 발견되면서 또 한번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1935년 평양 박물관은 경성 박물관으로부터 서봉총 금관을 대여받아 특별전을 열었는데 전시회를 마친 뒤풀이 술자리에서 일본인 관장 고이즈미란 자는 한 기생의 머리에 금관을 씌워놓고 흥청망청 술판을 벌이는 망동을 벌인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재에 대한 지워버릴 수 없는 망국의 수모인 것입니다. 나라를 잃으면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도 홀대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4-20

[보석상의 보석이야기]폼페이 최후의 날에 보석을 움켜쥐고 죽은 여인

가끔 나는 보석을 보고 있노라면 보석이 인간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은 보석을 보면서 우리네 인생 길어야 백 살인데 보석에 비하면 너무도 짧다. 그래서 그런지 인간은 보석을 소유하길 원한다. 아마도 죽지 않는 보석의 영원함이 부러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 산다. 우리도 언젠가 세상에 한 줌 재로 남을 거란 걸 인지하고 산다면 아마도 욕심부릴 일도 없고 악착같이 소유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장례식에 참석할 때 누워있는 시신의 모습을 보고 저 모습이 내 모습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먼저 간 이를 슬퍼하지만 장례식이 끝나면 언제 슬퍼했었나 싶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보석 일을 하다 보니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들을 통해서 느끼는 건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것들을 지키려는 그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수많은 난제를 뚫고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 가며 이룬 부이기에 그만큼 애착도 크다. 일전에 팔십을 바라보는 친한 손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앞만 보고 죽으라고 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보니 가진 것이 별로 필요가 없단다. 그리고 지난날 못 한 것들이 후회가 된다고 하신다. 부인과 제대로 된 여행 한번 가 본 적이 없고 가족을 위해서 지낸 지난날의 기억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기력이 없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면서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쓰지도 못하고 죽을 돈을 왜 그리도 욕심을 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신다. 세상을 사는데 돈이 있으면 많은 부분 편리하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와 가족을 생각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과의 시간도 돈 못지않게 소중한 것이다. 조금만 있다가, 나중에 하면서 우리는 많은 부분 가족이 기다려 주기 바라며 희생을 강요한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와 친한 선배는 나에게 틈만 나면 이런 말을 해 준다. 물들어 오면 노 젓고, 손뼉 칠 때 떠나라고.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때가 되면 그 일에서 손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면 욕심도 접을 줄 알아야 한다는, 참 쉬운 말 같은데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보석상식 45: 로마시대의 반지 로마시대 로마인들은 반지를 매우 즐겨 끼었다고 하는데, 그 반지로 그들의 부와 신분을 동시에 나타냈다고 합니다. 최고 신분인 원로원의 원로는 금을, 일반 귀족은 은으로, 노예와 같은 천민들은 철로 된 반지를 만들어 끼웠다고 합니다. 로마시대의 반지에는 마치 뱀이 손가락을 휘감고 있는 디자인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뱀이 다산과 정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에 보석을 움켜쥐고 죽은 여인의 유골이 나타나자 이것을 지켜본 발굴단장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 일생을 한 남자의 여자로 사랑받았을 그녀를 생각하니 보석이 더욱 빛이 납니다.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로 묻혀 버린 그들의 소중한 보석들이 천년의 세월을 돌아 되살아 났습니다. 짧은 인생사에 그들의 영화를 놓지 못하고 움켜쥔 체 죽어 가는 영혼이 얼마나 많을까! 이얘기 또한 나의 얘기겠지만 이것이 우리의 인생사를 단편으로 보여 줍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4-13

[보석상의 보석이야기]세계에서 가장 비싼 달걀, 파베르제 '이스터 에그' 탄생

싸움의 기술에는 선방이라는 것이 있다. 상대방이 전혀 생각지 못할 때 상대방의 치명적인 급소를 먼저 치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절 나는 친구로부터 선방을 맞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 한방은 운동장이 침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고,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몸소 깨우치게 해 주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체구가 왜소한 같은 반 친구는 선방의 달인이었다. 나는 그 작은 아이가 왜 교실에서 캡이 된 줄 그땐 몰랐다. 싸움은 덩치와 기술로 하는 줄 알았는데 그를 보면서 싸움은 강심장으로 한다는 걸 알았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간결하며 임팩트 있게 야수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노리는 것이다. 내 주먹을 맞고 상대방이 어떻게 될까라는 자비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단 한방으로 모든 걸 끝내야 한다. 나는 그의 선방 한방에 죽다가 살아났고 그 후로 그 작은 애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감히 복수하겠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 했다. 아니, 그를 피해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보석의 '보'자도 모르고 시작한 에메랄드 비즈니스, 나보다 더 많이 안다는 이 계통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얻어 맞았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사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가 돈을 뜯겨 본적도 있고, 시세보다 싸다면 의심해 봐야 하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가짜도 사봤다. 그래도 치명적인 한방이 없었기에 나는 그들의 무수한 잔매를 견뎌가며 에메랄드를 구입해서 수출까지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어릴 때 맞았던 한방의 기억이 내 무의식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나는 여러 경로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받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를 콜롬비아에서 외국으로 수출하게 되면 수출한 만큼의 돈이 외국에서 콜롬비아로 은행을 통해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이때 수출한 에메랄드의 액수를 실제보다 부풀려 더 많은 돈이 콜롬비아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머니 라운드리다. 머니 라운드리의 대가는 정말로 달콤한 것이다. 특별히 에메랄드를 팔려고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물건을 계속 수출하면 한 달이면 몇십만 불의 수익을 얻을 수도 있다. 지금이야 국가 간의 금융거래가 강화되 꿈도 못 꾸는 얘기지만 911 뉴욕 테러가 발생하기 전만 해도 국제 금융거래는 느슨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인간인데 이런 유혹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에메랄드 수출이 어려워질 때 나 또한 이런 유혹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현실에 닥친 시련이 너무 버거워서 잠시 내 머릿속의 악마를 밖으로 끄집어 낼까도 생각했지만 나를 이런 유혹에서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의지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겐 돌아갈 가족이 있었다. 무엇을 하든 믿고 따라 주는 아내가 있었고 세상에서 우리 아빠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나의 세 딸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식을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평생을 기도해 온 우리 어머니가 계셨다. 나는 INTENTION(의도)를 믿는다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마음을 갖고 다가 온다면 그 마음을 굳이 말로 표현 안 해도 나에게 좋은 카르마(KARMA)로 전달될 것이고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 한다면 그 기운이 나를 자각하게 만들 거란 걸. 그래서 옛말에 '마음으로 죄짓지 말라'는 말이 있다. 몸으로 짓는 죄만이 죄가 아니라 나쁜 마음 그 자체도 죄라는걸. 보석상식 44: 파베르제(FABERGE) 이스터 에그의 탄생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 3세는 유럽 출신 부인, 황후 마리아 페오도르브나의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부활절 선물로 러시아의 보석 명장 파베르제에게 보석으로 장식된 이스터 에그를 주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뜻밖의 선물은 황후를 감동시키게 만드는데 이를 계기로 황제는 황후를 위해 연례행사로 파베르제에게 이스터 에그를 주문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3세 사후에도 그의 아들 니콜라스 2세는 황실의 전통으로 그의 엄마와 그의 부인에게 이스터 에그를 선물하게 되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황실의 전통은 멈추게 됩니다. 파베르제는 32년간 50개의 이스터 에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8개는 러시아 혁명때 행방불명되었고 남은 42개만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황후를 사랑하는 황제의 마음이 새로운 보석을 탄생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입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4-06

[보석상의 보석이야기]아내에게 진짜 사랑 받는 방법은?

보석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나도 속물이 다 되어간다. 비즈니스 특성상 빠른 시간 안에 이 손님이 돈은 얼마나 많은지, 보석에 관심은 있는지, 그 물건이 마음에 들면 오늘 살 건지, 사고 난 후 꾸준히 내 단골손님으로 남을지를 파악해야 한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남자의 눈으로 바라본 것일 뿐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보안상 많은 보석 가게가 문을 잠그고 비즈니스를 한다. 어떤 분들은 초인종을 눌러야 문을 열어주는 시스템에 불편을 느낀다. 보석상 입장에선 당연히 보안상 문을 잠그고 할 수밖에 없다. 값비싼 물건을 쇼 케이스에서 꺼내 보여 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보석상뿐 아니라 손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보안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들어오면서 잠긴 문을 트집 잡는다면 그 사람은 손님이 될 확률이 별로 없다. 어떤 분들은 가게에 들어 오자마자 무작정 물건값을 물어본다. 그런 분들은 100% 안 사는 분들이다. 물건에는 관심이 없고, 물건값만 알고 싶다는 소리로 들린다. 물건을 사러 들어온 손님들은, 물건에 관심을 갖고 찬찬히 살핀 후 물건을 착용해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물건이 나한테 어울리는지를 확인하고 물건값을 물어본다. 내가 처음 보석 소매를 시작한 것은 백인들이 사는 팜 스프링스 지역이다. 처음 소매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어떤 사람이 실수요자고 어떤 사람이 아이쇼핑을 하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그래서 모델같이 예쁘고 화려한 사람이 들어오면 큰손이라 생각해 최선을 다했다. 반면 외모가 평범하면 눈요기나 하고 가겠지 하고 시큰둥했다. 하지만 의외로 큰 돈을 쓰는 속칭 ‘큰손’은 동서양을 떠나 외모에 크게 신경을 안 쓰는 사람들이다. 삶이 바빠 자기 자신을 꾸미기보단 가족과 일에 몰두하기에 본인을 위한 시간이 별로 없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그들의 부를 이루었기에 보석을 구입하는데 있어서도 당당하고, 남편들 역시 열심히 산 아내를 생각해서 기꺼이 사주고 싶어 한다. 외모가 화려한 사람은 보이는 것이 전부일 때가 많다. 속이 허하니 밖이라도 화려하게 꾸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매장에 있는 물건을 살핀 후 사진을 찍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 대부분 이런 분들은 누군가에 보여주고 당장이라도 살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15년간 소매업을 하면서, 사진 찍고 다시 와서 사 가신 분이 한 분도 없다. 다른 곳에 보여 주고 이렇게 만들면 얼마가 드는지 물어 보려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아냐고요? 저한테 그런 분들이 많이 오거든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사진 찍는 걸 허락하지 않지만 그래도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여자들은 값을 떠나 디자인이 우선 마음에 들어야 관심을 갖는데 반해 남자들은 같은 값이면 더 큰 사이즈를 좋아한다. 여자는 감성적인데 반해 남자는 경제적인 동물이다. 가끔씩 아내의 선물을 사기 위해 매장을 찾는 남자 손님들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쉬운 손님이다. 남자들은 물건 고르는데 많은 시간을 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가격 대비 괜찮은 물건을 권하면 대부분 쉽게 산다. 아내에게 진짜 사랑 받는 방법은 아내를 가게에 데리고 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게 한 후 본인은 멋있게 돈만 내면 된다. 보석상에게 있어 가장 큰 단골손님은 누굴까? 돈 많은 부자의 안방마님? 노노노. 보석을 좋아하는 부잣집 바깥양반이시다. 고가의 보석은 아무리 돈이 많은 여자라도 남편의 동의 없이 쉽게 구입하지 못한다. 아내는 좋아하는데 남편이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나 얻어 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남자가 보석을 좋아하는 경우는 여자가 원치 않아도 마음에만 들면 계속 살 수 있다. 이런 경우 남자가 돈까지 지불하고 갔지만 부인이 와 물러 달라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보석을 과연 좋아할까 의아해하는데 생각보다 보석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다. 남자도 좋아하는데 여자까지 보석을 좋아한다면 이런 손님은 보석상에게 있어 최고의 손님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까지의 얘기는 전적으로 내 개인의 생각이다. 보석상식 43: 세계에서 가장 큰 엘로우 다이아몬드, 티파니 엘로우 오늘날 현존하는 가장 큰 엘로우 다이아몬드 중에 하나인 티파니 엘로우는 뉴욕 맨허튼 Fifth Avenue의 티파니 매장에 전시되어 있다. 1877년에 사우스 아프리카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원석의 원래 무게는 287.42 캐럿이었지만 연마 과정을 거쳐 지금의 무게인 128 캐럿이 되었다. 1877년 찰스 티파니에게 팔렸으며 티파니 엘로우는 지난 140년 동안 단 2번만 착용하게 되었는데 한 번은 1957년 미세스 화이트하우스가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에서 열린 티파니 파티에서 착용했고, 두 번째는 1961년 오드리 햅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라는 영화 홍보를 위해 착용한 것이 유일하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3-30

[보석상의 보석이야기]마리 앙투와네트를 죽음으로 이끈 다이아몬드

어느 날 나는 서랍을 정리하면서 예전에 사용했던 여권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잦은 해외 출장으로 나는 10년에 한 번만 갱신하면 되는 여권을 두 번씩 받은 적도 있다. 그것도 일반여권의 두 배 분량이 되는 익스텐션 여권으로. 나의 지난 23년간의 여행 기록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생각하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로 설렘과 함께 흥분되었다. 한 장 한 장 빚 바랜 여권을 넘길 때마다 입국심사 때 받았던 무수한 스탬프들이 페이지에 빼곡히 차 있었다. 스탬프에 찍혀 있는 나라, 입국 날짜를 보면서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니 즐거웠던 일들도 많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스탬프는 내가 콜롬비아에 입국할 때 받은 것이었다. 그 수를 세보니 얼추 130번이 넘었다. 지난 시절 콜롬비아를 내 집 드나들 듯이 다녀왔지만 일 말고 다른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니 일 아닌 다른 것을 해 본 것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주말에 맑은 공기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그것도 어쩌다 보고타에서 두 시간 떨어진 저지대를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콜롬비아 제2, 제3의 도시인 깔리, 메데진도 가 본 적이 없고 카리뷰의 역사 도시며 유명한 휴양지인 카르타헤나나 산 안드레스도 한번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콜롬비아를 방문하면 꼭 가 봐야 하는 대통령궁, 금 박물관,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 보테로의 뮤지엄이 내 사무실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지척에 있건만 나는 작년에 그곳을 처음 가 보았다. 무엇이 내 삶을 이렇게 여유 없이 각박하게 만들었을까? 콜롬비아에서의 생활은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다. 에메랄드를 취급하다 보니 항상 안전과 보안에 신경 써야 했고, 가끔씩 주말마다 도둑이 사무실 벽을 뚫고 금고를 털어 갔다는 뉴스를 접하다 보니 주말에도 마음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불안한 마음에 주말이면 구입한 에메랄드를 아무도 몰래 사무실 금고에서 꺼내 내가 머물던 아파트로 가져와 내 베게 밑에 숨겨두고 잠을 청한 적도 있었다. 에메랄드를 정식 통관하는데도 불구하고 잦은 콜롬비아 출입은 미국 세관으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괴롭힘은 한때 내가 이 비즈니스를 계속해야 하나 마냐를 고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 나는 변호사를 고용해 정식으로 미 세관에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미 세관의 사과를 받아 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재발 방지 편지를 세관으로부터 받고 일단락되었다. 나중에 내 변호사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나를 잘 아는 누군가의 모함으로 내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한다. 어떤 한국 사람은 보석을 수입한다고 하면 마치 내가 밀수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보석에 대한 관세가 높기 때문에 많은 양의 귀금속이 정식 절차를 통하지 않고 몰래 들어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과 달리 보석에 대한 관세의 장벽이 없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서 오는 어떤 보석이든 관세가 굉장히 미미하거나 아예 없어 통관 브로커에게 소액의 통관비용을 지불하면 정식으로 수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브로커 비용 몇 백 불을 아끼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바보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수입해야만 은행을 통해 수입 대금을 콜롬비아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많은 현금을 몸에 지니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남들은 어떡하다 내가 비즈니스를 미국도 한국도 아닌 남미 대륙 콜롬비아에까지 가서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한다. 처음에 에메랄드란 보석은 내가 환상을 꿈꾸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 환상이 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르시는 분들은 내가 보석을 한다고 하니 어머 어마하게 많은 돈을 번다고 오해한다. 액수도 클뿐 아니라 남는 이익도 많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려면 학교나 학원에 가서 수업료를 내야 하는데 나 또한 보석을 알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보석을 배우기도 전에 냉엄한 인간 사회의 현실을 배웠다. 그리고 내가 보석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자신할 때 인생의 철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내가 땀 흘린 만큼 버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보석상식 42. 프랑스 역사상 희대의 사건이며 프랑스 혁명 발발의 계기가 된 마리 앙투와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 때로 거슬러 갑니다. 루이 15세는 그의 애첩 마담 뒤바리 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려 600개가 넘는 값비싼 다이아몬드로 목걸이를 주문하게 되는데 갑작스러운 그의 사망으로 목걸이를 팔 수 없게 되자 이 목걸이를 만든 보석상 주인 뵈머는 새 국왕의 아내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목걸이를 사 줄 것을 간청합니다. 하지만 당시 왕실의 재정상태로는 그 목걸이를 살 수 있는 여력이 없었고 그의 제안은 거절됩니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 제작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사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로 인해 프랑스 국민들은 이 목걸이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루머가 프랑스를 뒤덮게 되는데 사치스러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민의 굶주림은 외면하고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면서 국가 재정을 더욱 파탄에 이루게 한다는 루머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혁명 후 혁명정부는 앙투와네트를 심문할 때 목걸이에 대해 물어봤다고 합니다. 사치의 대명사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목걸이 사건은 그녀와 무관했지만 그녀의 사치로 인해 오해받은 사건으로 그녀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인생무상이지만 인과응보인 것 같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시리즈 전체 보기

2016-03-23

[보석상의 보석이야기]나폴레옹의 선물, 275캐럿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LA 거리는 노숙자들로 넘쳐난다. 노숙자의 증가 속도도 눈에 띄게 늘어나 LA 시는 홈리스 피플 문제 해결을 위해 판매세 인상을 만지작 거린다고 한다. 이제 미국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 소득의 양극화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기회의 나라로 불리던 미국, 열심히 살면 맨손으로도 부를 이룰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은 이제 책에서나 만날 수 있는 단어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칠 팔십 년대 이민 초기 한인들은 단돈 500불을 들고 비행기 트랩을 올라야 했고 손등으로 땀 닦을 시간도 없이 바삐 살아와 오늘날 남부럽지 않게 미국 시민으로 당당히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젠 이런 이민 선배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가고 있다. 돈 없이 미국에서 꿈을 키워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팜 데저트에서 비즈니스를 하던 때 내 이웃에는 고급 가구를 파는 유태인이 있었다. 가끔씩 그와 마주칠 때면 그는 얼굴 한가득 싱글벙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곤 커피나 한잔하자며 나를 끌고 이웃 카페로 데리고 갔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오늘 자기한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자랑질을 나에게 늘어놓았다. 혼자만 알고 있자니 입이 근 질했던 모양이다. 그는 오늘 한 손님에게 가구를 무려 백만 불 넘게 팔았다고 한다. 백만 불짜리 로토 당첨되기도 하늘에 별 따기인데 아무리 고급 가구를 판다 해도 백만 불어치 가구라니, 백만 불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나는 그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내 수준으론 그의 말은 지나가는 개도 웃겠다라고 단지 허풍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미국 사람들은 역시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야라고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은지 얼마 안 되어 그의 백만 불짜리 손님은 가구점을 왔다가 우리 숍에 들어오게 되고 그가 주문한 보석을 갖다 주기 위해 나는 아내와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서 내 이웃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성같이 생긴 집안 내부는 가구, 그림, 조각들로 가득 들어차 마치 어느 유럽의 궁전에 온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거대한 맨션에 달랑 둘이 살면서 방 하나 꾸미는데 몇십만 불씩 쓰고 몇 년에 한 번씩 같은 인테리어가 지겹다며 집을 통째로 리모델링해 버리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발 뻗고 누울 자리 하나 없어 거리로 내 몰리는 노숙자들이 오버랩됐다. 누구는 돈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 써도 써도 줄기는커녕 늘어만 가는데, 누구는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하니 왜 이리 세상은 공평하지 못한 걸까? 내가 태어나서 자란 한국은 지독히 못 살고 가난한 나라였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어릴 적부터 근검절약이라는 표어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살았고 우리 부모들은 쌀 한 톨 아껴가며 자식 가리켜 오늘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너무 없어서 절약해야만 살 수 있었고 절약이 미덕인 시대의 이야기인 것이다. 세계 경제의 침체로 각국의 중앙은행은 앞다투어 금리를 인하해 유럽과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의 시대에 와 있다. 갖고 있는 돈 은행에 두지 말고 세상 밖에서 사용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 몸에 혈액이 제대로 순환되지 않으면 건강에 이상이 오듯이 우리 경제의 피 같은 돈도 한 곳에만 있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네 인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공수거다. 나는 숍을 찾는 손님들에게 가진 것 좀 쓰고 살라고 말하곤 한다. 어차피 죽을 때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자식한테 남겨 놓고 가봐야 자식이 잘 먹고 잘 살 것 같지만 현실은 그놈의 돈 때문에 자식 간의 의만 상하게 만든다. 가진 것 쓰고 삽시다. 그래야 가진 것 없이 힘들게 살던 사람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인생역전의 기회도 오는 게 아닌가. 이제 세상은 소비가 미덕인 시대다. 보석상식 41: 나폴레옹 다이아몬드 목걸이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보석 전시실엔 나폴레옹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목걸이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그의 둘째 부인 마리 루이스가 아들을 낳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둘째 부인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이 목걸이는 에티엔 앤 선스 오브 파리스(ETIENNE NITOT AND SONS OF PARIS)에 의해 1811년 실버와 골드 그리고 172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졌는데 다이아몬드 무게만 무려 275캐럿에 이릅니다.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 유배되면서 그의 둘째 부인 마리 루이스는 그녀의 고향 비엔나 오스트리아로 목걸이와 함께 돌아 가게 됩니다. 그녀의 사후 목걸이는 그녀의 올케에게 상속되고 올케는 자신의 목에 맞추기 위해 두 개의 다이아몬드를 빼서 귀걸이로 만들지만 귀걸이의 행방은 그 후로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1960년 목걸이는 해리 윈스톤에게 팔리게 되는데 해리 윈스톤은 홉 다이아몬드와 함께 이 목걸이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하게 됩니다. 후대를 위해 인류 유산을 박물관에 기증하는 해리 윈스톤, 명품만 만드는 게 아니라 마음도 명품인 것 같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시리즈 전체 보기

2016-03-16

[보석상의 보석이야기]두 번 다시 없을 악녀가 무덤까지 갖고 간 보석은

항상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 덕에 팜 스프링스 지역은 오래전부터 시니어들의 은퇴지로 각광받고 있다. 나이 들면 생기는 신경통 관절염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후라 계절에 관계없이 각지에서 몰려온다. 평균연령 47세가 말해 주듯이 이곳은 시니어의 천국이다. 따라서 시니어 재혼율도 미 전국 최고여서 이곳에서 사별 이혼 그리고 재혼하는 일들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 부부 역시 재혼하는 커플 결혼식에 초대받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나는 이곳 팜 데저트에서 13년간 젊은 커플에게 결혼반지를 팔아 본건 매년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나이 드신 재혼 커플에게 결혼반지를 파는 건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재혼전문 보석 숍을 운영했던 것은 아니다. 이제 새 삶을 시작하는 젊은 신부들은 미래의 내 남편을 보고 결혼을 결심해서인지 대부분 신랑이 해 주는 반지에 만족하지만 나이 드신 재혼 신부는 당당히 본인이 원하는 것을 주장한다. '지금 아니면 나중은 없다'라는 마인드가 짙게 깔려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들 재혼부부들에게 결혼은 현실일 게다. 어떤 예비 재혼 신부는 대 놓고 3캐럿은 받아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해 같이 온 예비 신랑이 적잖게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커플이라면 신랑이 신부에게 “여보 내가 돈 많이 벌면 나중에 눈깔사탕만 한 다이아몬드 해 줄께.”라고 대포라도 칠 수 있지만 미래를 기약하기 힘든 노년 커플에겐 지금이 아니면 나중엔 국물도 없어서인지 원하는 걸 받지 못하면 결혼도 불사할 태세다. 그래서 가끔은 신부 몰래 남자 혼자 찾아와 자신의 속 사정을 하소연하신다. 그리고 본인 예산안에서 최대한 큰 걸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고 간다. 한 번은 칠십 후반쯤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매장을 찾아왔었다. 하도 다정해 보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시는 노부부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한창 사랑을 불태우는 노년 커플이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외롭게 혼자 지내다 모임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시절 하이스쿨 스윗하트(고딩시절 애인)와 재회하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사랑을 불 태우고 있던 것이다. 이들 커플은 재혼을 하고 얼마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할아버지는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고 할머니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우리 부부에겐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나의 이웃의 소개로 알게 된 태미와 리차드 커플인데 육십이 갓 넘어 연애를 시작했고 재혼에 성공한 부부이다. 지금도 태미는 내 아내에게 전화를 해 그들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자랑한다. 그리고 남편인 리차드는 태미에게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 매일같이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들 부부를 보면 어떡하다 이제 만났나 싶을 정도로 젊은 부부 못지않게 사랑을 불태운다. 코리아타운에 숍을 오픈한지도 1년 반이 지났다. 홀로된 한인들에게도 노년의 재혼 문제는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다. 매장을 찾는 부부로 보이는 커플들 속에는 가끔씩 황혼 연애를 하는 커플들이 섞여있지만 그들은 대놓고 당당하게 그들의 연애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 사람들의 당당함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아마도 가족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대놓고 연애를 한다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거 아닐까 생각한다. 또 미국 사람들과 달리 한인에게 있어 노년의 재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자식들을 생각하고 지인과 가까운 친척들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서로 사랑하지만 주위의 반대로 재혼하지 못하는 커플도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노인네들이 징그럽게 무슨 연애야라고 한다. 의학의 발달로 우리에게 백세 인생은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당신도 시간이 지나면 노인이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석상식 40: 두 번 다시 없을 악녀 서태후가 사랑했던 보석, 비취(JADE) 중국 청나라 말기 47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황제위에 군림했던 세계 역사상 두 번 다시없을 여걸 혹은 악녀인 서태후의 보석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태후는 보석광이었는데 그녀의 비취(JADE)사랑은 역사에 남을 만큼 유명합니다. 그녀는 비취 팔찌, 반지 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로 보호판을 길게 달았습니다. 식사때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음식을 차리게 했으며,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했고, 사후에는 비취를 비롯한 수많은 보석들과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유독스럽게 강한 중국인들의 비취 사랑은 아마도 서태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시리즈 전체 보기

2016-03-10

[보석상의 보석이야기]영국 황실의 프로포즈 반지는 재수가 없다?

그녀가 내 돈에 손을 댄다는 것을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론은 쉽지 않았다. 여느 콜롬비아 사무실처럼 그녀는 사무실 청소를 비롯해 손님을 위해 음료를 서빙하고, 가끔씩 시간이 없어 점심을 나가서 먹을 수 없을 때 간단한 음식을 나에게 준비해 주었다. 그리곤 일주일에 두 번씩 내 아파트 청소를 잊지 않고 해주었다. 나는 혹시 모를 응급상황에 대비해 아파트 옷장 깊숙한 곳에 얼마의 현찰을 항상 숨겨놓고 다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숨겨놓은 돈이 가끔 그것도 조금씩 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아예 한 번에 현찰이 통째로 사라지거나 계속해서 조금씩 돈이 빈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사라지는 돈의 액수가 거의 차이가 없었고 그것도 어쩌다 모자라기 때문에 내가 카운트를 잘 못했나, 아니면 최근 들어 건망증이 심해졌나 내 정신 상태를 스스로 질타하곤 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정하고 몇 번이고 돈을 세어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신기하게도 그녀가 다녀간 다음날 정확하게 그 돈이 그 자리에 있었다. 괜히 그녀를 의심했다고 생각하니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그러다 한참을 더 지난 후 나는 그녀가 내 돈을 가져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는 커피를 블랙으로 마신다. 하지만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는 버릇이 있는데 그녀는 내가 커피에 설탕을 타서 마시는 날에는 그 전날 내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날만을 골라 내 돈에 손을 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술 때문에 정신이 없어 없어진 돈에 대해 내 탓으로 치부한다는 것을 알고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많은 돈도 아니고 딱 한 장의 지폐만 가지고 갔다. 나는 콜롬비아에서 생활하면서 궁금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콜롬비아 은행 지점장은 여자들이다. 남자가 지점장인 곳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 번은 이런 궁금증 때문에 지점장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왜 지점장이 모두 여자인지를. 물론 내가 물어 본 지점장 역시 여자다.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여자는 남자들처럼 간이 크지 않아 사고를 쳐도 작게 치기 때문에 은행에 끼치는 피해가 적어 남자보다는 여자를 지점장으로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 나니 그녀에게 화도 났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느꼈다. 견물생심이라 하지 않나. 눈에 보이는 돈의 유혹을 그녀가 그냥 지나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라면 땠을까 생각해 보니 나 또한 그런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곳에 돈을 두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 거고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두고 고민 또 고민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을 없던 일로 그냥 모른 채 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고 그녀에게 책임을 묻고 그녀를 해고하자니 그녀의 세 아이들 생각났다. 몇 달에 한 번씩 주말에 직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야외에 나가 바비큐 파티를 하곤 했고 나는 그때 그녀의 세 아이들을 만나곤 했다. 당장 그녀가 그만두게 되면 아이들만 데리고 사는 그녀의 생계가 막막하게 된다. 싱글맘으로 세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콜롬비아와 같은 저소득 국가에서는 더더욱 녹녹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월급으론 아이들과 살수 있는 방 한 칸에 겨우 끼니 해결하기도 빠듯할 것이다. 그녀를 해고하지 않고 그녀에게 이런 행동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나는 우선 옷장에 숨겨 두었던 비상금을 치우면서 내가 그녀의 행동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술을 먹은 다음날이면 호텔에서처럼 식탁 위에 땡큐 노트와 함께 약간의 팁을 놓고 나왔다. “고마워 ㅇㅇㅇ 내방을 깨끗이 치워 줘서” 그녀는 내가 회사를 닫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 일해 주었고 누구보다도 나와의 작별을 섭섭해했다. 보석상식 39: : 영국 황실의 황태자비 다이애나의 프러포즈 반지 영국의 황태자 찰스가 다이애나비와 약혼할 1981년 당시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선물한 사파이어 반지는 큰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12캐럿의 세일론 사파이어에 14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는 그녀의 약혼반지는 특별히 영국 황실에서 주문된 커스텀 메이드가 아닌 제라드 보석가게 쇼케이스 안에 전시되어 있던 여러 반지 중에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가격 또한 미 달러로 육만 불 정도 하는 그리 비싸지 않은 반지였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와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수많은 진귀한 보석들을 소유하고 있는 영국 황실에서 이렇게 수수한 약혼반지를 선물했다는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다이애나비가 사망한 후 이 반지는 윌리엄 왕자에서 물려주게 되었고 재수 없는 반지라는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윌리엄 왕자가 캐서린 미들턴에게 결혼반지로 선물을 하게 됩니다. 윌리엄 왕자의 약혼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반지는 보통 사람들의 반지라는 뜻의 COMMONER'S SAPPHIRE라고 불려집니다. 다이애나비와 캐더린 미들턴이 대단한 귀족의 집안이 아닌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 붙여진 이름인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재수 없는 반지가 아닌 영원한 엄마의 사랑이 담긴 행복한 반지로 남기를 바라 봅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시리즈 전체 보기

2016-03-03

[보석상의 보석이야기]세상에서 가장 비싼 에메랄드 주얼리를 받은 여배우

며칠 전 신문에 콜롬비아 정부와 콜롬비아 좌익 반군 조직인 무장 혁명군(FARC) 이 벌여온 3년간의 기나긴 평화 협상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내용과 함께 콜롬비아 산토스 대통령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회담하는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정재계 인사는 물론 외국인까지 서슴없이 납치 협박 살해 테러를 일삼아 온 콜롬비아 반군의 시대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지는 순간이다. 나는 지금도 콜롬비아에서 회사를 차린 후 첫날 아침의 아비규환을 잊지 못한다. 낯선 땅 남미 콜롬비아에서 맞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나선 첫 출근길, 아침을 재촉하는 출근 인파로 붐비는 거리는 무장한 군인들과 경찰이 뒤섞여 행인과 차량을 통제하며 몇 시간 전 일어났던 차량 폭탄 테러를 수습하고 있었다. 총기 소지가 합법화된 미국도 거리에서 총기를 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콜롬비아는 거리를 순찰하는 무장군인과 경찰, 샷건으로 무장한 빌딩 경비원들 그리고 사무실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구비해 놓은 한 두 정의 권총들로 무기를 접하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 내가 살던 한국의 70-80년대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도 이렇게 많은 무장군인을 본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콜롬비아에서 일하면서 사기, 살해 협박, 납치 등 수많은 일들을 겪어온 나였지만 결정적으로 콜롬비아 회사를 접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이 일을 겪으면서 이다. 얘기는 익히 많이 들었어도 남의 일로만 생각했지 나에게도 이런 차례가 돌아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어느 날 날아온 정체불명의 팩스 한 장이 나의 인생 항로를 바꾸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송신자도 쓰여있지 않는 팩스의 내용은 조국 콜롬비아의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단체에 도네이션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송신자가 누군지 밝히지도 않으면서 돈을 달라니 어이가 없어 그냥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그 후로 비슷한 내용의 팩스가 하루가 멀게 오더니 어느 날부터는 문구가 호전적으로 변하면서 급기야 노골적인 협박으로 이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나는 주위에 수소문해 이 팩스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이는 다름 아닌 콜롬비아 반군, 즉 게릴라가 보내온 일종의 세금 통지서였던 것이다. 속칭 게릴라라 부르는 콜롬비아 반군은 규모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었다. 한때 번성할 때는 몇 십만 명에 이르러 콜롬비아 정부도 그들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안데스 산맥 깊숙한 곳을 거점으로 삼고 고액의 보수를 보장하는지라 산골의 순진한 청년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분위기여서 그들을 소탕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게릴라전은 콜롬비아군이 게릴라전에 대한 노하우를 쌓는 계기가 되었으며 많은 외국 군대에서는 게릴라전 연구를 위해 콜롬비아로 그들의 군인을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나 또한 그 일로 인해 콜롬비아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한국에서 파견 나온 여러 명의 영관급 장교들과 알고 지냈다. 게릴라들은 그들의 거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 주요 수입원은 콜롬비아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기업과 단체로부터 협박을 통해 돈을 뜯어내는 행위였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은 회사의 주요인물을 납치하거나 회사에 직접적으로 테러를 가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콜롬비아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기업들은 본의 아니게 콜롬비아 정부와 게릴라에게 바쳐야 하는 이중 과세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구멍가게 수준의 소규모 회사를 운영하는 나에게도 차례가 오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콜롬비아에서의 삶은 산 너머 산이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시련, 이제는 뭔가 됐겠구나 하면 다가오는 좌절, 우리네 인생이 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그 굴곡진 삶은 예외가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어려웠던 많은 일들 속에 나를 도운 누군가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 여기까지 와 있지만 더 이상은 그런 행운에 나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회사를 정리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니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들은 그저 기억일 뿐 내가 한동안 몸담았던 콜롬비아에 평화가 찾아 온다니 나도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를 콜롬비아에서 떠나게 만들었던 게릴라도 이제는 역사로 남는다. 보석상식38: 세상에서 가장 비싼 에메랄드 주얼리 어릴 적 KBS 명화극장에서 봐 왔던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녀의 배역과 결혼생활뿐 아니라 그녀의 보석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녀와 두 번의 결혼생활로 유명한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은 1964년 그녀에게 결혼 선물로 에메랄드 목걸이를 선물합니다. 이 목걸이는 60.50CT의 최상급 콜롬비아 에메랄드로 만들어졌으며 이외에 에메랄드 반지, 팔찌, 귀걸이, 브로치를 선물하게 되는데 이들 가치는 무려 1억 불에 육박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는 지금 세상에 없지만 그녀의 보석만큼은 영원히 우리 곁에서 그녀를 기억하게 만들 것입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시리즈 전체 보기

2016-02-25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타이타닉의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는 가짜였다?

콜롬비아에서 생활하다 미국으로 돌아오면 직원들과 회식 자리를 갖곤 했다. 단합대회 겸 내가 없는 동안 열심히 해달라는 일종의 단도리를 하는 자리였다. 한국사람인 나와 인연을 맺은 덕에 내 직원들은 좋든싫든 한국 음식에 익숙해 있었고 그래서 대개는 한국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지만 가끔은 콜롬비아 식당을 찾기도 했다. 괜찮다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간 콜롬비아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남루한 옷차림에 초췌한 몰골로 식당 주위를 배회하는 그는 누가 봐도 노숙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내게 뭔가 말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부담스러워 피해버렸다. 몇 달이 지난 후 친구들과 그 식당을 찾았을 때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몇 달 사이 그의 행색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기죽어있던 모습은 간 곳 없고 마치 오랜시간 거지로 살아온 사람처럼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다. 식당 입구로 들어서는 나에게 잰 걸음으로 달려와 구걸을 시작했고 나는 순간 “스패니시를 할 줄 몰라 (NO ABLO ESPANOL)” 라고 둘러댔지만 그는 바로 ‘스패니시가 안되면 영어로 해도 돼’라며 유창한 영어로 받아쳤다. 나는 할말을 잃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남미에 가본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지만 남미 사람들은 유독 영어를 잘 못한다. 그래서 남미를 여행할 때는 간단한 스패니시는 할 줄 알아야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때문에 유창한 영어로 구걸하는 그를 마주하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잔돈을 꺼내려고 하는데 친구들이 나를 식당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버럭 화를 냈다. “네가 그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을 더 망치는 일이야. 그 돈으로 마약을 살 테니까.” 내내 그가 마음에 걸렸던 나는 식사 후 남은 음식들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그는 음식을 열어보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기는 채식주의자라 고기를 안 먹는다며 도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거지 주제에 뭘 가려먹나 싶은 생각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그런 행동이 나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시켰다. 유창한 영어에 채식주의자 그리고 그레이 헤어, 하얀 피부색, 푸른 눈을 가진 그의 외모는 약간의 영어 액센트만 빼면 미국에서 흔히 보는 백인의 모습이었다. 밤새 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 밖에서 비를 맞고 지냈을 그를 생각하며 나는 오래된 내 가죽 점퍼를 갖다 주기 위해 그를 다시 찾았다. 가죽 점퍼를 건네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나는 채식주의자라고. 그리고 나는 동물 애호가야. 그래서 이런 동물의 가죽 따위를 뒤집어 쓰지 않아.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야. 이제 이해가 돼?” 배울만큼 배웠고 채식주의자로서 동물애호가로서 강한 신념을 가진 그가 왜 마약에는 강한 신념으로 맞서지 못하고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걸까? 물론 마약과 오랜 거지 생활로 그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마약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콜롬비아가 세계적인 마약 공급처라 많은 콜롬비아인들이 마약에 중독 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약으로 병든 사람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말인즉 먹고 살기 힘든 콜롬비아인들이 마약을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풍요로운 미국같은 선진국에서 마약 중독자를 쉽게 접할수 있다. 마약도 먹고 살 만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석상식37. 바다의 심장(THE HEART OF THE OCEAN)이라는 보석을 아십니까? 1997년에 만들어진 영화 타이타닉을 보신 분들은 영화에 나온 큼직한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 ‘바다의 심장(THE HEART OF THE OCEAN)’을 기억할 것입니다. 호프 다이아몬드 목걸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 목걸이는 처음에는 영화 제작을 위해 큐빅 지르코니아로 만들어졌지만 후에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170캐럿의 사파이어와 30캐럿의 다이아몬드로 다시 만들어졌고 영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 셀린 디온이 1998년 오스카 시상식에 이 목걸이를 걸고 나와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석이 되었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은 이 목걸이가 타이타닉 실화에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계십니다. 허구의 스토리에서 만들어진 보석이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석이 되는 것을 보면 영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2-18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카네기 멜런 대학 며느리의 명품백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죠다쉬라는 브랜드의 청바지가 크게 유행했다. 당시 물가로는 꽤 비싼 고가품이었는데 어떻게든 하나 장만해서 입고 싶었다. 멋있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이걸 못 입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촌스러운 애로 여겨지는 분위기 탓이 컸다. 한국사람들은 유독 남을 많이 의식한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한국 속담도 있지만 지금도 이 같은 습관은 변함이 없는 것같다. 내가 코리아타운 매장에서 한국분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고가의 명품을 파느냐 아니면 명품과 똑같이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상품이 본인의 취향에 맞고 유니크하면 구입하는 보통의 미국인들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나만의 독특함을 표현할 수 있는 보석을 구입하는 미국인과 달리 한국사람들은 남이 해서 보기 좋은 보석을 선호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사람들은 운동으로 균형잡힌 몸매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차고 들고 신고 다니는 것들이 매우 유사하다. 마치 어떤 부류에 속하려면 가져야 할 필수품이 정해진 것같다. 팜 데저트 매장을 운영하던 10여년 전 어느 날, 칠십대쯤 되어보이는 백인 여성이 찾아왔다. 운동으로 균형잡힌 몸매도 아니고 옷을 잘 입은 것도 아닌, 집에서 음식하다 나온 아줌마처럼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 백인 할머니였다. 쇼케이스를 유심히 둘러보다가 반지 하나에 멈춰서더니 꺼내 보여 달라 했다. 그리곤 반지 모양을 자기 취향에 맞게 일부 변형시켜 만들어 줄 수 있는지를 물어 왔다. 며칠 후, 주문한 반지를 찾으러 온 그녀가 써준 체크를 받아들며 나는 깜짝 놀랐다. 샌드라 멜런 본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체크는 멜론 뱅크에서 발행하는 체크였다. 그녀는 카네기 멜런 대학으로 유명한 멜런가의 며느리였던 것이다. 그녀는 보통 본인의 자가용 제트기를 이용해 여행하지만 가끔씩 시간이 맞지 않으면 일반 여객기를 탈 일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팜 데저트 우리 매장을 찾아왔고 부담없이 하고 다닐 칵테일 링을 맞춘 것이다. 전통적인 미국 부자 가문의 며느리라 한껏 치장하고 최고가의 백이라도 하나 들고 다닐 것 같지만 그녀는 손녀가 정성스럽게 직접 만들어 준 손 주머니를 들고 다닌다. 그리곤 볼 때마다 그 손 주머니 자랑을 어찌나 하든지 이 할머니 정말 멜론가의 며느리가 맞나 의심해 본 적도 있다. 내가 코리아타운에 매장을 오픈하고 몇 달 안 되었을 때의 얘기다. 육십대지만 오십대 정도로 보이는 한 여성이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어디 한곳 흠 잡을데 없이 완벽한 밸런스였다. 균형잡힌 완벽한 몸매, 백옥같은 피부, 세련된 헤어컷 그리고 몇년은 기다려야 하나 살 수 있는 최고가의 가방, 보석, 시계 등등. 부유한 사람을 많이 봐온 나도 감히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울 만큼 그녀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우리 매장에 여러 번 왔지만 한번도 흐트러짐 없이 항상 완벽한 외양을 유지했고 이런 외모를 유지하려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할까, 그녀의 남편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후에 주위에서 들은 얘기로 그녀는 착하고 젠틀한 남편과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다 한다. 그러다 굉장한 부자를 사귀게 되었고 그러자 남편을 버리고 지금의 부자 남편과 재혼해서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얘기였다. 보석상에 올 때마다 늘 평범한 차림인 미세스 멜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좋은 옷 좋은 보석이 많을텐데 왜 차려입고 다니지 않느냐고.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파티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아니고 동네 상점 가는데 잘 차려 입고 가서 뭐하게” 보석상식36.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20세기 전만 해도 다이아몬드는 제한된 공급량으로 인해 왕족이나 귀족 그리고 소수의 부자들만 소유할 수 있는 특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우스 아프리카에 엄청난 양의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유통회사인 ‘드 비어스(De Beers)’에서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A diamond is forever’라는 슬로건과 함께 광고를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1947년의 일입니다. 이 광고는 예상을 뒤엎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오늘날 다이아몬드를 보석의 대명사로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지금도 드 비어스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는 카피로 일년에 2억 달러의 광고비를 쓰고 있습니다. 실제 다이아몬드는 드 비어스의 광고처럼 영원하지만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다이아몬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광고만 믿고 아무렇게나 다루지 마세요.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다이아몬드가 망가질 수 있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2-11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백인 친구 데니스의 와인바는 일년 열두달 ‘성업중’

“요즘 비즈니스 어떠세요? ” 물으면, “너무 조용해.”“힘들어.” "정말 경기가 장난이 아니야.”"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죽는 소리가 태반이다. 간혹 긍적적인 대답이래봐야 그럭 저럭”괜찮아” 정도다. 이런 와중에 간혹 ‘비즈니스가 너무 잘된다’는 분을 만나면 괜히 불안하다. 돈이라도 빌려달라면 어쩌나 싶어진다. 여기까지는 내가 한인타운에서 듣는 소리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비즈니스가 잘 돼도 표현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정이 많은 성품 탓에 힘들다는 이웃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서일 게다. 매일 죽는 소리하면서도 실은 10년 20년 같은 사업을 이어가는 분들이 많다. 타인종들에게 요즘 어때? 를 물으면 대부분 “굿” “베리 굿” “엑셀런트” “판타스틱” “원더풀” 등 무한 긍정 대답이 쏟아지고 나도 모르게 힘이 솟다 못해 질투가 날 지경이다. 팜 데저트에서 비즈니스 할 때 이웃에서 와인바를 하던 데니스라는 백인이 있었다. 아이스크림 숍을 하던 자리에 와인바를 차려 들어왔던 그는 셰프 출신이라 와인 뿐 아니라 와인과 곁들여 먹는 음식도 제법 맛있게 만들었는데 그 값이 만만치 않게 비쌌다. 인사를 나눌 때면 그는 항상 비즈니스가 너무 잘된다고 말했다. 일년 열두달 ‘잘된다’는 그의 자랑질을 듣노라면 이따금 괜히 성질도 나고 꼴보기 싫기도 했지만 병당 천달러가 넘는 고가의 와인을 다즌으로 팔았다, 만달러가 넘는 케이터링 오더를 받았다, 며 기뻐하는 그가 내심 나는 부러웠다. 어느날 샌드위치를 사려고 그의 가게에 들어서는데 가게가 텅 비어 있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비즈니스가 너무 잘 된다는 너스레를 실컷 들었던 나는 한 밤 자고나니 도깨비처럼 텅 비어버린 가게 풍경에 충격을 받았다. 데니스는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또 다른 이웃의 얘기다. 고가의 페르시안 카펫을 파는 이란인 나딜이 6개월 한시적으로 영업하는 조건으로 이웃 가게에 들어왔다. 고가의 카펫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싼값에 파는 마지막 기회라고 신문과 TV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보내며 선전했다. 나딜은 나와 마주칠 때면 너무 바빠 인사도 나누기 힘들었고 전화기를 귀에 달고 살았다. 그러던 그가 하루는 원가 이하로 카펫을 줄테니 사라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당신의 고가품을 살 형편이 안 된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또 어느 날은 내 보석과 자기 카펫을 바꾸자는 제안을 해왔고, 어떤날은 그렇게 팔아서 어떻게 돈을 벌겠느냐며 자기에게 비즈니스를 맡겨 놓으면 3개월 안에 모든 물건을 팔아 주겠노라 제안하기도 했다. 연일 지역 신문엔 파격적인 그의 세일 광고가 도배되었고 그는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로 바쁘다며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그 또한 약속한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건물 주인은 세 한푼 받지 못했고, 신문 방송사들도 광고비를 다 떼어먹은 그를 추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중에는 카펫의 진짜 주인이 나타나 재고를 한번에 처분해 준다는 나딜에게 물건을 몽땅 주었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며 하소연했다. 한국인들은 너무 겸손해 그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지만 반대로 서구 사람들은 매사에 긍정적이다 못해 과장이 심해 그 속사정 또한 알 수가 없다. 한국인이 오케이라고 하면 굉장히 좋다는 의미지만 서구사람에게 오케이란 힘들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미국에서 살려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또다른 지혜가 필요하다. 보석상식35.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컬리난 다이아몬드 1905년 사우스 아프리카 프리토리아 지역의 프리미어 광산에서 3106캐럿의 다이아원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판정되어 컬리난(CULLINAN)으로 불리게 된 이 다이아몬드는 9개의 큰 스톤과 100여개의 작은 스톤으로 커팅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스톤인 컬리난 원, 일명 ‘STAR OF AFRICA I’ 은 무게가 무려 530캐럿에 이르며 아직까지도 연마된 다이아몬드 중에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317캐럿의 컬리난 투(STAR OF AFRICA II)가 있으며 컬리난 쓰리(STAR OF AFRICA III)는 94캐럿에 이릅니다. 이 세개의 대형 다이어몬드 주인은 모두 영국 왕실로, 타워 오브 런던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2-04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언어 폭력이 극에 달해 지면에 올릴수 없는 이야기

한인타운으로 매장을 옮기고 같은 한국사람이 그것도 생면부지인 한국 손님들이 처음 매장을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다. 어떤 분들은 언어 폭력이 극에 달해 지면에 차마 옮겨 놓을 수 없는 말들도 있다. “아니 이 집은 얼마나 대단한 걸 판다고 왜 이렇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장사하는 거야?” 들어오면서 짜증을 낸다. - “당신 강도 당해봤어? 남이사 문을 걸어 잠그던지 문을 활짝 열어 놓던지 당신이 웬 참견이야, 그리고 우리 대단한 거 팔거든” 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 손님 보안상 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어요.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러니 손님도 없고 장사도 안되지.” 손님이 혼자 중얼거린다. - 우리 비지니스 잘되거든, 마켓도 아닌데 사람이 바글거릴리 있나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 손님 잘 못들었는데 저한테 뭐 물어 보셨어요?” 라고 말한다. “ 여긴 왜 아저씨가 일을 해 손님은 다 여자일텐데, 여기 일하는 아줌마 없어요?” - “악세사리 사러 오셨어요? 아줌마, 악세사리 사러 오셨으면 잘못 들어왔어요. 여기 악세사리 가게 아니예요. 얼마나 비싼 물건 취급하는데 달랑 여자만 일하다 강도 당하면 당신이 책임질거야” 라고 되묻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 일하시는 분이 잠깐 나갔는데 금방 돌아 올겁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 있는 에메랄드가 다예요? 에메랄드 전문점이라고 선전 크게 하면서 생각보다 볼게 없네.” - “손님 저희숍에 오기전에 에메랄드 보신적도 없지요? 다른 곳에 가면 몇개 보기도 힘들어요. 요즘 에메랄드가 얼마나 귀한데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손님이 원하는게 없으신가 봐요? 손님 더 좋은 걸 찾으세요? 원하시면 금고에서 더 좋은걸 꺼내 보여 드릴수 있어요. 하지만 다시 약속을 잡고 안으로 들어와 보셔야 해요 라고 말한다. “ 이거 오천불이면 충분해, 내가 오천불 줄께 팔어.” - “아니 그렇게 잘 알면 본인이 직접 만들지 왜 여기와서 힘들게 말씨름을 하시나 그리고 만불짜리를 자기 맘대로 반으로 뚝 잘라, 아예 가게 주인도 하시지.”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손님 그렇게 해 드릴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다. “ 여기서 제일 비싼게 뭐야?” “어떤 걸 찾으시는데요?” “ 제일 비싼거?” “비싼 것도 종류를 말씀해 주셔야지요? 다이아몬드인지 칼러스톤인지?” “왜 내가 없어 보여? 너 나 무시하는거야?” - “그래 너 무시한다. 너처럼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대답하리 밑도 끝도 없이 비싼 거 내 놓으라고 막무가내로 들이대면..” 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손님, 저 손님 무시하지 않는데요. 손님이 정확히 뭘 원하시는지 알아야 도와 드릴 수 있을것 같아서 여쭤보는 거예요” 라고 말한다. “아니 이싸구려 다이아 몇개 박아 놓고 뭘 그렇게 많이 받으려고 해 그냥 3천불에 줘” - “허 싸구려? 그러는 당신은 왜 굳이 싸구려 다이아를 사려고 해. 당신 싸구려야!” 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 손님 저희 좋은 다이아몬드 사용해요. 그리고 그 가격에는 드릴 수가 없어요.” “나 이거 팔고 싶은데 얼마 줄 수 있어요?” 물건을 처분하려 손님이 들어왔다. “이천불 드릴께요” “ 뭐 이천불! 내가 얼마주고 산건데… 팔때는 비싸게 팔면서 살때는 거져 먹을려고 해 정말 도둑놈 심보야!” “손님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불가리매장” “그러니까 그렇죠. 거긴 비싸잖아요. 왜 거기서 사셨어요?” “거긴 명품이니까 믿을 수 있잖아” - “야! 내가 너한테 이물건을 팔았니? 왜 나보러 도둑놈 심보래, 살때 우리는 못 미더워 명품 매장가서 사면서 팔 때도 믿을 수 있는 명품 매장가서 도로 팔지 왜 나한테와서 성질을 내” 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손님 가격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곳도 알아 보세요”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매장을 찾아주시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좋은 인품과 인성을 갖고 계신다. 위의 예는 극소수의 사람들과의 경험이다. 일부 한인들은 미국 쇼핑몰에서는 고분고분 좋은 소비자로 행동하면서 한인이 운영하는 쇼핑몰에서는 유독 같은 한국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민생활은 고달프다. 언어적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며 모국이 아닌 타국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녹녹한일이 아니다. 이민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가족을 먼저 생각지 않으면 남은 내가족을 더 소홀이 대하 듯 같은 한인이 한인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타민족은 우리를 더 무시할려고 들것이다. 요즘 우리가 느끼는 한인타운경기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만큼 어려워지고 있다.이럴때 일수록 서로에서 상처주는일없이 따듯한 한마디라도 건네줄수 있으면 어떨까?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말도 곱다.” 보석 TIP: 홉 다이아몬드(HOPE DIAMOND)의 저주, 진실 혹 거짓?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이아몬드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홉 다이아몬드를 꼽습니다. 홉 다이아몬드는 회색톤의 진한 블루 다이아몬드입니다. 홉 다이아몬드 원석의 무게는 110.50캐럿이었지만 현제의 모습으로 컷되어지면서 45.52캐럿으로 바뀌었습니다. 희귀성과 가치에 있어서도 압도적이지만 또한 홉다이아몬드에 얽혀있는 전설로도 유명합니다. 홉 다이아몬드의 탄생은 17세기 중반이지만 여러 주인이 바뀌다 1839년 헨리 필립 홉이라는 사람이 구입하면서 페밀리 이름을 따 홉 다이아몬드로 불려지게 됩니다. 이후 2명의 주인이 더 바뀌면서 삐에르 카티에르(PIERRE CARTIER)에게 넘어 가게 되는데 카티에르는 이 다이아몬드를 홍보하기 위해 허구의 스토리를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누구든 홉 다이아몬드를 소유하면 불행하게 된다는 ‘홉 다이아몬드의 저주’인 것입니다. 그후 1958년 해리 원스톤이 백삼십만불에 구입해 워싱톤 D.C.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일반인도 언제든지 볼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일으킨다는 옛말이 생각납니다. 홉 다이아몬드의 저주, 진실 거짓을 떠나 누구든 욕심이 과하면 그 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1-27

[보석상의 보석이야기] 전문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코리아타운 프라자에 매장을 오픈하기 전 나는 인사 차원에서 그리고 입점 후배로서 이웃 보석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내가 누구라는 소개와 함께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말을 건넸는데, 웬지 상대방은 이런 상황이 생소한지 무척 당황하는 걸 느꼈다. 물론 같은 업종이 들어오니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을게다. 내가 팜 데저트에 처음 매장을 오픈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 이웃 보석상들이 줄줄이 찾아와서 인사를 건넸다. 어떤 보석상은 본인이 세공 기술자라 소개하며 급한 수리가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본인이 많은 다이아몬드를 보유하고 있으니 손님이 찾으면 연락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기 소개도 없이 무작정 물건을 보여 달라하더니 물건을 살펴본 후 자기가 이웃 보석상임을 밝히는 무례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보석상임을 밝히지 않고 손님으로 가장해 물건을 둘러본 후 사라지는 이웃도 있었다. 그래도 13년간 그곳에서 일하면서 대부분의 보석상들과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고 경쟁자로, 친한 이웃으로 지냈다. 그리고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서로에게 연락해 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보석의 특성상 보석상들이 모든 종류의 보석을 취급할 수도 없고, 모든 보석을 다 잘 알 수도 없다. 의사들이 신체 모든 부분을 다 잘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 더 많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같은 업종이니 경쟁자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유하고 있는 보석들이 제각각 달라 모양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쥬얼리를 가공한 기술자의 실력이 다 다르고, 들어가는 내용물의 질 또한 천자만별이다. 이런 속사정을 잘 아는 손님들은 이곳 저곳을 다니지않고 믿을 수 있는 곳을 단골로 정해서 다닌다. 그래서 다른 업종과는 달리 보석은 경쟁이 생각보다 치열하지 않다. 코리아타운에 와서 한국 분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다이아몬드 가격을 비교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팜 데저트에서는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구체적인 스펙 (예를 들어 1.51캐럿, 칼라 E, 흠은 VS1)을 말해주며 이런 것이 얼마냐고 묻는다. 어떤 분은 이런 다이아몬드를 다른 매장에서 보았는데 당신은 얼마에 팔거냐고 대놓고 묻기도 한다. 나는 본적이 없는 물건이라 가격을 말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다른 곳은 말해 주는데 당신은 장사하기 싫으냐, 물건이 없구만, 당신 GIA 나온 거 맞느냐, 다른 매장에서 받은 가격이 싼 건지 비싼 건지만 가르쳐 달라는 등등 다양하고 집요하게 물어온다. 내가 가격을 낮게 말해주면 다른 매장의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할 것이고 내가 비싸게 말해주면 나는 도둑놈 취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닫아 버린다. 다른 매장에서 본 다이아몬드와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닌데 보지도 않고 어떻게 가격을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그곳에서 보신 게 마음에 들면 그걸로 정하라고 말한다. 물론 손님을 잡기 위해 내게 유리한 쪽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나의 그런 행동은 보석상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정직하고 객관적인 사고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본다. 가격 비교 문의 다음으로 많이 받는 질문은 본인이 보는 앞에서 보석 셋팅을 해 줄 수 있는 지에 대한 질문이다. 비싼 돈을 들여 장만한 보석이 행여 바뀔까 하는 걱정에서 물어보는 질문이다. 그리고 간혹 우려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매장과 공장을 같이 운영한다는 것이 보석상 입장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비용도 문제지만 유독 물질을 취급하기 때문에 시에 허가를 받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방법 외에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손님에게 셋팅 전후의 보석이 본인 것임을 확인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미경으로 흠을 확인 시켜 준다던지, 보석의 크기를 셋팅 전후로 측정해 본다던지 하는 방법이다. 코리아타운으로 매장을 이전한 지 일년 반이 되었다. 과거와 비교해 한인들의 생활수준, 의식수준이 몰라 보게 향상되었다. 과거에 소박한 반지 하나로 만족했다면 지금은 보석다운 보석을 원하고 디자인 또한 미국사람 못지않게 세련된 것을 원한다. 과거에는 가격 위주로 쇼핑을 했다면 지금은 품질에 더 신경을 쓴다. 보석상들도 예전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손님을 대할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의 발달과 SNS 등으로 손님들 또한 다양한 경로로 본인이 사고자 하는 보석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님을 대할 때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지 한번 더 확인해 보고 그래도 모른다면 솔직히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보석상식 34] 노란색의 반란 불과 20년 전만 해도 엘로우 다이아몬드는 화이트 다이아몬드에 비해 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값도 꽤나 저렴해서 같은 크기라면 화이트에 비해 삼분의 일 심지어 그 밑으로도 얼마든지 구입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바뀌니 지금은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가공업체들의 마케팅도 한몫을 했지만 중국 경제의 성장으로 황금색을 선호하는 중국인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탓입니다. 더불어 과거에는 진주 축에도 끼지 못했던 골든 진주도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석 팔자도 시간문제인 것 같습니다. HARRY KIM (K&K FINE JEWELRY) kkfinejewelry@gmail.com

201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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